[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⑥ 서상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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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⑥ 서상륜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19.07.2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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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서상륜(徐相崙, 1848-1926)전도인(한국성경 번역, 한국 최초의 권서)
서상륜(徐相崙, 1848-1926)전도인(한국성경 번역, 한국 최초의 권서)

 

홍삼장수가 권서가 되다

서상륜은 1848년 평안도 의주에서 서석순(徐奭淳)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동생으로는 서상우(경조)가 있었다. 일찍이 14세에 부모를 여의고 동생 경조와 함께 만주를 드나들며 홍삼 무역을 했다. 그러던 중 서상륜은 1878년에 영구(營口)에서 열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의주 친구들, 선교사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7-1905), 의료선교사 헌터(J.M. Hunter)의 도움과 치료로 회생하였다. 병중에 이미 매킨타이어에게 복음을 받은 바 있던 서상륜은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자인 선교사 로스(John Ross, 나약한 羅約翰, 1842-1915)를 ‘섭리적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로스는 의주에서 온 이응찬 등과 함께 요한복음, 마가복음을 번역하였으나 이응찬이 어쩔 수 없이 의주로 돌아가게 되면서 번역을 중단한 상황이었다. 로스는 서상륜을 한국어 선생 겸 번역인으로 채용하여 누가복음 번역을 맡겼다. 이후 의주로 돌아갔던 서상륜이 다시 합류하여 누가복음 번역을 수정하고 인쇄하는 일을 도왔다.

그의 본격적인 활약은 세례를 받고 권서로 임명된 1882년부터 시작되었다. 서상륜은 영국성서공회의 첫 번째 권서로 임명되었고 ‘함께 엎디어 주께 도와주시며 보호하심을 기도’한 후 의주를 향해 떠났다. 의주의 신자들과 구도자들이 계속해서 성경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쇄국정책을 시행하던 조선과 청을 유일하게 잇는 곳이 고려문이었는데, 서상륜은 거기서 세관 검사관에게 지고 있던 모든 성경을 압수당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세관 검사관이 의주로 직접 찾아와 성경을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서상륜은 의주와 그 주변에서 성공적인 권서 활동을 마친 뒤 남은 성경을 들고 서울에 ‘잠도’(潛到)했다.

로스는 성경을 더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서상륜에게 성경을 보내게 되는데, 1883년에는 평양 권서로 활동하게 된 류춘천 편에 한상자를, 1884년에는 약 천 권을 전달한다. 1884년의 사건은 제물포해관 사건으로 유명하다. 로스는 당시 외무아문협판인 묄렌도르프의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제물포로 들어가는 책을 서상륜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제물포 해관이 성경 상자를 발견하고 압류했으나 아내의 부탁을 받은 묄렌도르프가 서상륜을 불러 사정을 듣고서 압류된 성경이 그에게 전달되도록 중재를 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달된 복음서를 들고 펼친 서상륜의 권서 활동은 서울에서 많은 신자들을 만들어냈고, 1885년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서울에 이미 복음의 씨앗이 많이 뿌려져 자라고 있음을 보고 놀랐다.

 

서경조와 황해도 장연군에 소래교회를 세우다

소래교회.
소래교회.

서상륜이 의주에서의 권서 활동을 마감할 즈음 서상륜, 서경조 형제는 고향 의주를 떠났다. 서상륜은 권서 활동을 위해 서울로, 서경조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동(松川洞)에 터를 잡았다. 여기에서 1883년부터 1884년 사이에 ‘소래교회’가 시작되었다. 형 상륜과 함께 이미 매킨타이어의 전도를 받은 바 있고 성경 번역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한바 있던 동생 경조가 개종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1885년 초에 세례청원자가 20명을 넘기게 되었다. 1885년 3월 서상륜은 만주봉천(심양)을 방문하여 로스에게 소래의 20명을 포함하여 70여 명의 세례청원자가 있음을 보고하며 조선을 방문하여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당시 고려문의 상황은 더 나빠져서 로스는 조선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입국하여 소래에 머물면서 1년 이상 그곳 교인들을 지도하던 서상륜이 이번에는 1886년에 서울로 와서 언더우드 등을 만나 소래에 있는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의 지방 여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지속되자 마침내 그는 1887년 1월에 소래교회의 교인들 4명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것도 적지 않은 여행경비와 숙박비 일체를 스스로 부담하면서였다. 소래에서 온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이 3명은 ‘목숨을 걸고’ 1887년 1월 23일에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어서 그해 가을에는 마침내 언더우드가 소래로 가서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때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가 유아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개신교 최초의 유아세례 교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1895 두번째 세워진 기와지붕 교회.
1895 두번째 세워진 기와지붕 교회.

소래교회의 성장에는 서경조의 공이 크다. 서경조는 소래에서 1889년에는 게일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1891년에는 어학교사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펜윅(Malcolm C. Fenwick, 편위익 片爲益, 1863-1936)과 함께 지내며 한글을 가르쳤다. 서경조는 한때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裵偉良, 1862-1931) 선교사와 함께 밀양, 부산, 대구 등 남부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소래에 자리를 잡은 뒤에는 장연군에 칠곡교회, 곡산읍교회 등 10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했고, 소래로 내려온 매켄지(William John Mckenzie, 김세 金世, 1861-1895) 선교사와 협력하여 새 예배당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했다. 소래의 예배당은 과부가 예배당 터를 기증하고, 갯벌에 나가 조개를 파서 번 돈을 헌금하고, 나무, 쌀을 대는 등 외국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토착인 예배당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전도의 열매들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서울에서 소래 까지의 경로.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서울에서 소래 까지의 경로.

 

서상륜이 서울에서 2년 동안 권서 활동을 한 결과 1885년에 선교사들이 입국할 즈음에는 상당수의 개종자들이 서울에 존재하게 되었다. 물론 서상륜 혼자서 해낸 일은 아니었다. 로스와 매킨타이어, 그리고 이응찬, 서상륜 등이 만들어낸 로스역 성경, 그리고 로스가 열정적으로 뿌렸던 전도의 씨앗이 열매를 맺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굳이 서상륜을 힘써 이야기하는 것은 새문안교회 때문이다.

새문안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로서, 언더우드에 의해 1887년 9월 27일에 ‘정동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교회 설립에는 14명의 세례교인이 참여했는데, 그 가운데 서상륜이 있었고 그 외 거의 전부가 ‘서상륜의 결실’이었다. 그동안에는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영어 예배만 있었으나, 이제 조선인들에 의해 우리말로 예배를 드리는 조선인 교회가 조직되었으며, 더구나 장로 두 명을 선출하게 된다. 이날 교회 창립 모임에는 서상륜을 권서로 파송했던 만주의 로스가 초청을 받아 역사적 현장에 감격적으로 함께하기도 했다. 새문안교회를 이 땅에 탄생시킨 장본인은 언더우드 선교사였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여러 손길, 특별히 그중에서도 서상륜의 역할이참으로 컸다.

그의 활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언더우드의 전도인으로 임명 받았으며, 그래함 리(Graham Lee, 이길함 李吉咸, 1861-1916) 선교사를 도와 연동교회를 세우고, 사무엘 무어(Samuel Forman Moore, 모삼열 牟三悅, 1840-1906) 선교사를 도와 승동교회를 세우고, 서경조와 함께 옹진군 백령면에 중화동교회를 세웠다. 1891년에는 마펫(Samuel Austin Moffett, 마포삼열 馬布三悅, 1864-1939) 선교사와 게일(James Scarth Gale, 기일 奇一, 1863-1937) 선교사가 서울-송도-평양-의주-봉천-자성-함흥-원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장장 3개월 동안의 전도여행을 떠났는데, 서상륜은 이들을 의주까지 인도하는 역할을 맡아 함께하기도 했다. 남북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서상륜은 1910년경 소래로 가서 복음을 전하며 여생을 보냈다. 1926년에 그가 사망하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서상륜의 열정적인 복음 전도 사역을 총회장으로 기렸다.

 

서상륜의 아픔

장로교회 첫 조사들. 백홍준, 서상륜, 최명오.
장로교회 첫 조사들. 백홍준, 서상륜, 최명오.

1890년 서상륜은 언더우드의 조사, 즉 안수 받지 않은 토착인 목회자로 정식 임명을 받고 정동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는 언더우드와 함께 주일 설교를 담당했고 주중에는 제중원에 나가 환자들에게 전도했으며, 특히 여름철에 선교사들이 휴가로 자리를 비울 때면 서울지역 목회는 거의 그가 책임을 졌다. 1888년 겨울 이후에는 매년 겨울 서울에서 열린 신학반에 참석하여 목회자 교육도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실질적인 한국교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끝까지 장로로 안수 받지 못했고, 평양신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한 채 평신도 전도자로 남았다. 이유는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매혼으로 들어온 아내를 혼인 첫날에 거절하고, 후에 자신이 직접 정한 여인을 진짜 아내로 여기며 살았다. 그럼에도 집안에서는 소박맞은 아내를 관습에 따라서 법적인 본처로 대접하여 한 집에 살게 했던 것이다. 그는 관계를 정리하라는 선교사들의 결정에 불복했다. 조사직을 박탈당하고 입교인 명부에서 삭제되는 아픔까지 겪었던 서상륜은 1898년에 ‘예외적으로’ 직책이 회복되어 다시 서울에서 활동하게 되지만, 1907년에 승동교회에서 서상륜을 장로로 피택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최종적으로 장로로서 ‘무자격’임을 선고 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울을 방문한 어떤 뉴욕 신사에게서 “정말 멋진 분입니다!”라는 감탄을 들을 만큼 쾌활하고, 위엄 있고, 세련되고, 공손한 사람이었으며,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진지하고 예리한 설교자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서상륜의 장례식을 총회장으로 치른 것은 모두가 그를 한국교회 지도자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김학수 화백의 소래교회 그림. 100주년 기념관.
김학수 화백의 소래교회 그림. 100주년 기념관.

 

글 임희국, 서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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