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조선 말기: 일본과 미국에서 세계를 배우다
이상재는 세도정치가 한창이던 1850년(철종 원년)에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1867년(18세, 고종 4년)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그는 친지 이장직(李長稙)의 소개로 박정양(朴定陽, 1841-1904)과 인연을 맺는다.
이후 13년간 박정양의 개인비서로서 경륜을 쌓으면서 20대의 청년기를 보냈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881년에 박정양이 조사시찰단(소위 신사유람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갈 때 이상재가 수원(隨員)으로 동행하게 된 것이다. 조사시찰단이 4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내무성, 외무성, 대장성, 문부성, 공부성, 사법성, 농상무성, 육군, 세관, 포병공창, 도서관, 박물관 등을 골고루 조사하고 보고서를 제출했음을 보면 당시 시찰단원들의 안목이 얼마나 넓어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1887년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박정양의 요청으로 친군영에서 ‘문안’이라는 관직을 받아 일하던 이상재는 초대 주미 전권공사가 된 박정양과 함께 1등 서기관 자격으로 미국행 배에 몸을 싣는다. 청나라는 1887년에 주미 조선전권공사가 임명되었을 때 조선의 외교권을 자신들의 관할 아래 놓으려는 ‘영약삼단’(另約三端)이라는 특별한 단서를 붙였으나 박정양은 이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를 만나 국서를 봉정하는 등 자주적 외교를 펼쳤다. 결국 박정양은 청의 압력으로 1년 만에 조선으로 소환되었다. 청년의 시기를 온전히 박정양 곁에서 보냈으며 조사시찰단과 전권공사의 임무를 함께 수행했던 이상재가 조선의 주권, 독립, 개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상재는 귀국 후에도 박정양을 보좌하면서 전환국 위원,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부 참의, 학부 참서관, 법부 참서관, 외국어학교장, 내각총서(관제 개편 후 의정부 총무국장)와 중추원 일등의관의 관직에 몸담는다. 그는 이 자리에서 탐관오리를 색출하고 당시 만연한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애썼다.
대한제국: 독립협회, 그리고 감옥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
당시 조선은 풍전등화요 극도로 혼란한 상태였다. 을미사변(1895)의 참사를 겪은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가 정무를 보게 되었으며(아관파천, 1896-1897), 1897년에는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중추원 일등의관 이상재는 서재필, 윤치호, 남궁억 등 30여 명의 인사들과 함께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하였다(1896).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고, 모화관을 개정하여 독립관으로 현판을 바꾸었고, 독립공원 건립을 추진했으며, 이상재는 독립관에서 열리는 정기 토론회에서 독립협회의 지명 토론자로 활동했다.
1898년 협회는 만민공동회와 함께 중추원 개편안을 골자로 한 의회설립안을 제출했고, 고종이 새로운 중추원 관제를 발표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익명의 벽보 사건이 일어나 결국 독립협회는 해산을 당하고 만다. 벽보에는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실시하여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이상재를 내무대신으로’ 임명하려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정양은 관직에서 해임되었고, 당시 회장이던 윤치호는 체포 직전 몸을 피했으며, 부회장이던 이상재를 비롯한 독립협회의 간부들 17명이 체포되었다. 수많은 대중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경무청으로 행진한 결과 석방되었으나 이상재는 관직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상재는 1902년 6월에 다시 구금된다.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이원긍, 홍재기 등이 국사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조선협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를 재건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부일당들과 협력해서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역모죄가 적용되었다. 이상재는 둘째 아들 승인과 함께 구금되어 60일 동안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옥고를 치렀다.
의금부 감옥에 있던 수감자들을 찾아와 위로한 이들은 선교사 벙커, 아펜젤러, 게일 등이었다. 특별히 게일은 연동교회 목사로서 조선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고 한문에 능하여 이들의 대화상대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1903년 1월에 감옥 안에 도서실이 설치되면서 성서공회의 후원으로 서양학문 서적과 성경이 차입되었다. 이상재는 신약성경을 읽는 중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을 읽으며 감동을 받았고, 요한복음을 적어도 30회 이상 정독했다.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이상재를 비롯한 일부 국사범들을 석방했다. 출옥한 이상재는 김정식(경무관), 안국선(조경군수), 유성준(가선대부, 내부경무국장), 이원긍(대제학, 군국기무처의원), 홍재기(중추원의관, 총리대신 비서, 개성군수) 등의 감옥 동지들과 함께 연동교회의 교인이 되었고, 게일이 초대 회장으로 있었던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전신)에 가입한다.
을사늑약 이후: YMCA와 함께 영원한 청년으로 살다
이상재는 1905년 잠시 의정부 참찬으로 머물다가 관직에서 은퇴했다. 그런데 이후 몇 년은 이상재 개인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1907년에 부인 유씨와 장자 승윤이, 1908년에는 둘째 아들 승인이 세상을 떠났다. 망국의 한과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이기기 힘들어 자결을 결심하기도 했으나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종교부장 겸 교육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YMCA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아한인민(我韓人民)의 당연(當然)한 의무(義務)”라는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한제국의 병의 근원이 무엇이오?…한마디로 급심병이라. 이러한 급심병으로 어찌 생활을 바라겠습니까? 오직 의무는 무엇이오? 하나님의 계명을 정성껏 지켜서…깊은 뜻을 깨달아 저가 무기로 하거든 나는 도덕으로 하고, 저가 포학으로 하거든 나는 인애로 하고, 저가 강제로 하거든 나는 약하게 하면,…선악이 이미 판단되었은즉 하나님께로부터 상벌이 어찌 없겠습니까? 오로지 우리 국민의 의무는 이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이상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성경공부에 집중했다. “진리에 압도당하고, 심정은 변화를 겪었으며, 가슴에 기쁨이 넘치는 중생한 사람”이 인도하는 성경공부로 인해 한 해에만도 754명이 믿기로 작정했고, 875명이 이상재의 사경반에 등록했으며, 만국기도일에는 1,200명이 넘는 청년들이 회관 강당에 모여 구원의 말씀을 들었다. YMCA 총무로 오래 일했던 질레트(P.L. Gillett)는 어느 날 전도집회에서 54명이 믿기로 작정한 다음 이상재가 옆방에 들어가 무릎 꿇고 흐느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마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기도하는 모습과 같아 감격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상재가 앞장섬으로써 1910년에 시작된 제1회 전국 기독학생회 하령회이다. 이는 국내 청년수련회의 효시이며, 한국 기독교 최초의 에큐메니컬 집회로 기록되어 있다. 깊은 영적 성장을 위해서 여섯 교단에서 온 소수의 46명만을 모았고, 강사는 16명으로 4개국의 국적을 갖고 있었다. 하령회가 거듭되었고, 마침내 1914년에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가 조직되었다.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무단정치를 했다. 그리고 1911년에는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105인 사건)을 일으켜 눈엣가시와도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했다. 이때 이상재는 셋째 아들 승간이 세상을 떠나 장례를 위해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관계로 화를 면했다. YMCA는 정치운동조직이 아니었지만 그 어느 조직도 개인도 나라의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 사건으로 총무 질레트가 추방당했고, 일제는 후임 총무직을 놓고 어용단체 유신회를 이용하여 갖은 공작을 펼치면서 YMCA를 일본화하려고 했다. 민족의 지도자들이 대거 감옥에 들어가고 해외로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 환갑을 넘긴 원로 이상재가 총무직에 오르면서 YMCA의 큰 기둥이 되어 그 와해공작을 막아냈고, 집회·출판·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는 상황에서도 YMCA는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든든히 서서 3·1운동의 발판이 되어 주었다.
1919년 3·1운동 전 ‘손병희와 모의를 거듭할 때 다수는 한결같이 살육을 주장하였으나 오직 이상재는 남을 살육하는 것은 우리가 죽기로 항거하여 대의를 세움만 같지 못하다고 제의했다. 그리하여 무저항 비폭력의 혁명운동이 처음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정작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이름에는 이상재가 빠져 있다. 일제가 ‘독립운동의 수령’이라고 불렀던 이상재는 ‘일본정부와 담판하게 될 때 내세우기 위하여 아껴 두었던’, 즉 후사를 도모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1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일제가 강점한 상황이었으므로 조선YMCA와 일본YMCA의 관계도 큰 문제가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22년 이상재, 윤치호를 대표로 하는 조선과 일본 YMCA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1913년에 맺은 일본YMCA에 대한 조선YMCA의 가맹 조항을 폐기하기로 결의했다.
나라의 모든 주권이 박탈된 상태였지만 조선YMCA는 독자적인 조직으로 세계무대에 나서게 되었고, 마침내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대회에 참석하는 큰일을 해냈다. 이때 73세가 된 이상재는 조선YMCA 연합회 회장으로서 신흥우, 김필례 등을 인솔하여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과 담판을 벌임으로써 조선YMCA의 독립을 관철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1920년 미국 국회의원 49명이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내한한 적이 있는데, 이때 이상재는 수많은 인파를 이끌고 이른바 제2독립운동의 일선에 섰다. WSCF 대회에서 돌아온 후에는 김필례, 김활란 등과 함께 한국YWCA의 기틀을 마련하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하여 1923년에 발기총회를 개최했으며, 1924년에는 소년척후단(지금의 보이스카우트연맹)의 초대 총재로 추대되었다. 또한 그는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 지방전도운동, 창문사운동 등 1920년대의 운동들을 진두지휘했으며 1924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추대되어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질하자”면서 〈조선일보〉가 민족지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가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병석에서도 ‘신간회’창립과 초대 회장직을 맡았던 이상재는 1927년 3월 39일에 78세를 일기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민중의 선구요 사회의 원로로 늙은 청년”이었던 이상재의 장례는 좌익과 우익, 종교와 사회단체를 뛰어넘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동아일보〉는 “선생이 가시니 조선은 어디서 의를 찾으며 조선인은 어디서 사표를 구하랴. 선생은 오직 덕의 사람이니 선생을 생각함에 우리는 업적을 구하지 아니하고 사상을 구하지 아니한다.…정치의 표면상 갱장(更張)만으로 조선을 구하지 못할 것을 자각한 옹은 50세 노구로 단연히 기독교에 몸을 던져서 민족적 정신적 갱생을 철저히 주장하여 왔다.…하여 의연히 사회의 주석(柱石)을 이루었다”고 썼다. ‘영원한가치는 초월적인 것이며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월남 이상재. 그는 우리나라에 짙은 구름이 드리우고 그 암울함이 점점 더해져만 가던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품고 행했던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인생의 롤모델이 없다고 말하는 이때 ‘영원한 청년’ 이상재를 마음에 담아 보자.
공동집필 : 임휘국 서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