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복음 전도자의 길로
격헌(格軒) 양전백은 1869년 3일 10일 평북 의주군 고관면 상고동에서 태어났다. 증조부의 슬하에서 한문을 배우고, 구성에서 훈장 노릇을 하다가 박영신(朴永信)과 결혼했다. 30세때 서울 정동교회 사경회에 참석하여 복음을 접했고, 이듬해에는 김이련(金利鍊)을 도와 의주 신시교회 설립에 참여했다. 그때까지도 ‘유생(儒生)의 틀’을 벗진 못했던 양전백은 평양으로 마펫(S.A.Moffett, 마포삼열)을 찾아가 성경을 배우면서 진리를 깨닫고 세례를 받았다. 마펫의 보고서에는 “양전백은 학식이 있어서 아는 것이 많고, 아무도 추종하기 어려울 정도로 으뜸이 될 것이다. 이미 성경을 많이 읽고 신앙심이 깊었으므로 곧 세례를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신시교회가 파괴되자 집을 팔아서 400냥을 헌금하고, 그래함 리(Graham Lee, 이길함)가 200량을 보태 신시교회를 복원했다.
이후 양전백은 권서(勸書)로 활동하면서 전도에 힘썼고, 1896년에는 평북 순회 조사(助事)로 임명 받았다. 그해 양전백은 선교사 공의회 결정으로 평북을 담당한 휘트모어(N.C.Whittemore, 위대모)의 조사가 되자 선천으로 이사하고 선천(북)교회를 담임했다. 1900년 평북도사경회가 개최되자 관서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에 힘쓰는 한편, 명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일했다. 1902년 선천(북)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07년 6월 평양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평북과 남만주 순행목사로 임명되어 2년을 시무하면서 압록강 건너 즙안, 통화, 회인현에 이르기까지 걸어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는데, 그가 평생 전도 여행한 거리를 합하면 12만 리에 달한다.
독립운동가의 길로
양전백은 1906년 신성중학교를 설립했다. 신성학교는 정주 오산학교, 평양 대성학교와 함께 서북지방의 3대 민족사학으로 불렸다. 1907년 보성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에도 힘썼다. 한일합방이 되자 평안도 지방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이 확산되었다.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모살사건’(일명 105인 사건‘)을 조작했는데, 중심무대가 신천역이어서 신성학교의 피해가 컸다. 기소된 123명 중 교사 10명, 학생 18명에 양전백까지 총 29명이 신성학교 소속이었다. 조작된 사건이어서 증거라고는 피의자의 자백밖에 없었고, 경찰은 허위 자백을 끌어내기 우해 잔혹한 고문을 가햇다. 신성학교 재학 중에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선우훈(鮮于燻)은 《민족의 수난-백오인의 피눈물》에서 은사인 양전백의 당시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밤 아홉 시경에 수갑 찬 손에 콩밥 조금을 들고 다리를 절며 의복을 거두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방 안에 들어서서 미친 사람같이 손바닥에 콩밥만 핥아 잡수신다. 머리털 전부가 뽑히었고 한 개 수염도 없었다. 내 곁에 앉았으되 반사(半死) 상태로 된 그는 문안(問安)도 없고 대답도 없다.”
양전백은 1심에서 6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1913년 3월 석방되었다.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교회로 복귀한 그는 첫째 주일 강단에서 설교 전에 폭탄선언을 하였다.
“나는 이제 교역자의 직분을 사직해야겠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옥중생활 중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여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으니, 주의 강단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신학지남>(1933.3)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은 울면서 사임을 만류했다. 그는 1년 후에 평북노회 노회장에 선출되었고, 1916년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이 되었다.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다
1919년 2월 선천남교회에서 평북노회가 열렸다. 노회 중에 서울을 다녀온 이승훈(李承薰)이 12일 아침에 양전백의 집을 찾았다. 마침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이명룡(李明龍)이 함께 자리했는데, 이승훈은 서울에서 천도교 측과 논의한 거사 계획을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양전백과 이명룡은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유여대는 의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김병조는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의 지사들과 연결하도록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양전백은 3월 1일 태화관 모임에 참석하여 독립을 선언한 후 출동한 순사들에게 연행되었다. 판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은 좋은 기회만 있다면 다시 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양전백은 105인 사건 때 모진 고초를 겪고도 평소 조국 독립에 지속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이것은 그의 취조서를 보면 잘 나타난다. 1919년 1월 28일 양전백은 이승훈과의 만난 자리에서 <매일신보>에 실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기사를 읽고 독립을 청원하는 문제를 상의햇고, 2월 6일에는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파견된 선우혁(鮮于爀)이 그의 집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모의했다. 3.1독립선언식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할 때도 2월 23일 평양에서 함태영(咸台永)과 만나 그때까지의 진행 상황을 서로 논의했음이 밝혀졌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양전백은 길선주(吉善宙)처럼 3.1운동 단순 참가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였다. 이렇게 오랜 기간 준비가 있었기에 선천의 3.1운동은 어느 도시보다 조직적이고 강렬했다. 양전백은 민족대표로 상경했지만 3.1운동은 신성학교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계획되었던 것이다.
3월1일 오후 2시 선천북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 학생 수백 명이 만세 시위를 전개하여 33명이 구속되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 3.1운동에서 첫 발포가 이뤄진 것도 3월 1일 선천에서였다. 박은식의 《혈사》에는 “선천에서는 3월 8일까지 총 17회의 시위가 일어났고, 사망 3명, 부상 55명, 피검자가 450명이엇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전백은 3.1운동으로 2년의 옥살이를 마친 후 선천북교회로 복귀하여 목회를 계속하였다.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을 일구다
1911년 8월 일제는 기독교계 지도자 17인을 초청하여 일본의 주요 도시를 순회케 하고 학교와 산업시설을 견학시켰다. 가는 곳마다 시장이 주최하는 환영식이 열렸는데, 하루는 양전백에게 연설할 기회가 돌아왔다. 그는 이런 취지로 말했다.
“본인이 목회하고 있는 우리나라 선천 지역은 인구가 3천 명인데, 그 중의 4/5인 2천 4백명이 예수를 믿소. 불신자 3백 호(戶) 중에 1백 호는 일본인들이오. 한 도시가 실로 기독교의 분위기에 싸여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이 선천에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한국교회사에서 경이로운 도시 선천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었다. 양전백은 1896년 선천(북)교회 조사로 부임한 이후 한 교회에서 37년을 목회하면서, 20여 년간 세례를 베푼 사람이 3천 명이 넘었는데 당시로는 엄청난 숫자였다. 또 명신학교, 신성학교, 보성여학교,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이처럼 그의 목장은 교회, 학교, 고아원을 망라하는 선천지역 주민들었으며, 신자들뿐 아니라 주민 모두에게 존경받는 민중의 지도자였다. 이런 점에서 같은 시기의 길선주가 부흥사였다면 그는 전도자였다. 또 그의 생애는 목회자이자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였다. 1933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양전백이 세상을 떠나자 <신학지남>에는 추모의 글이 실렷다. 이것을 현대문으로 소개한다.
“선생은 말을 잘하는 웅변가도 아니요, 글을 잘 쓰는 문장가도 아니며, 수완이 좋은 사교가도 아니요, 임기응변에 능하고 지략이 뛰어난 선비도 아니다. 다만 강직한 성품을 가진 정의로운 사람이며, 아랫사람에게는 도타운 사랑을 베푸는 정열의 사람이다. 비리와 부르이 앞에는 추호도 굴하지 않는 마음,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보고는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마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신학지남>(19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