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⑩ 남궁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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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⑩ 남궁억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21.04.13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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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남궁억(南宮檍, 1863-1939)교육자, 언론인, 독립운동가(무궁화 보급)
남궁억(南宮檍, 1863-1939)
교육자, 언론인,
독립운동가(무궁화 보급)

교육 과정
한서(翰西) 남궁억은 남궁영(南宮泳)과 덕수 이씨 사이에서 1863년 12월 27일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한성부(서울) 종로방(종로) 왜송골(정동)이며, 고향은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이다. 중추부도사(都事)직에 종사를 지낸 바 있던 부친이 일찍 별세하여 홀어머니가 가정 경제를 감당해야 했기에 가정 살림이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한문 사숙에서 9년(1874-1883) 동안 한문 공부를 했고, 한문 사숙에서 공부하
던 중 16세에 남원 양씨와 혼인하였다. 그의 나이 21세 되던 1883년에는 영어만 가르쳐 통역전문가를 양성하는 통일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의 부속기관인 동문학(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동문학은 청나라 이홍장의 막객이었던 해관(海關) 묄렌도르프(P.G. Von Möllendorff)가 외아문협판 겸 총세무사로 부임하면서 1882년에 세운 학교이다. 남궁억은 동문학에서 1년간 공부하였으며, 1884년 말수석으로 졸업했다. 

관직 생활
남궁억은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세관에서 2년 동안 일하면서 영어 실력이 더욱 향상되었다. 그의 나이 24세 되던 1886년에는 내부주사(內部主事)로 채용되어 고종의 어전통역관 역할을 감당했다. 그 후 궁내부 별군직에 임명되어 4년 동안 고종을 시종하였고, 1893년 칠곡부사로 자리를 옮겼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여파로 갑오개혁(갑오경장)이 실시될 때, 내무부 토목국장에 발탁되어 서울 종로와 정동 일대 등의 도로를 정비하였고,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축조공사를 감독하여 완공하였다. 1895년에는 서울의 민가를 재정비하고, 낡은 건물은 철거한 후 도로를 넓혔다. 이렇듯 정부 관료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던 남궁억은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남궁억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1903년 3월 성주목사에 부임하였다가 1905년 11월 일본과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자 관직에서 재차 물러났다. 그 후 다시 양양군수로 복직하였으나(1906년 2월),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사건으로 퇴위되고 정미칠조약을 체결했을 때, 남궁억은 이를 반대하다가 관직을 사임하였다.

▲ 한국 최초 외무부의 영어 통역관 양성학교인 관립 동문학 수업 모습이다. 남궁억은 1884년 1회로 졸업했다.
▲ 한국 최초 외무부의 영어 통역관 양성학교인 관립 동문학 수업 모습이다. 남궁억은 1884년 1회로 졸업했다.

계몽운동
남궁억은 서재필이 1895년 12월 귀국하자 그를 만나 언론사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기자 겸 영문판 필진 및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또한 그는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자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에는 그해 3월 8일(창간호는 3월 2일) 창간된 상업신문(商業新聞)인 <경성신문>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나수연(羅壽淵), 유근(柳瑾) 등과 함께 인수한 후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이 되었다.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체로 발간된 일간지였다.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면서 언론(신문)을 통해 애국 계몽운동을 하던 남궁억은 1899년 12월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후부터는 언론활동만을 통해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는 1900년 7월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자신들 임의로 분할한다는 소식을 접한 후 이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여 외국 신문을 이용하여 폭로하였다. 이 일로 남궁억은 일본 경무청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남궁억은 체포 구금되어 옥고를 치른 이후에도 러시아와 일본 등 한반도 주변국들이 한반도를 자신들의 뜻대로 통치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면 언론을 통해 폭로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는 광무 5년(1902) 5월 러일협정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발발 이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러시아와 맺은 것이라면서 러일협정 내용의 문제점을 <황성신문> 사설에 실었다. 이때 일본 경무청은 그를 곧바로 체포하지 않고, 1903년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하여 쿠데타를 도모했다는 구실을 만들어 4개월 동안 구속한 후 석방하였다. 남궁억은 출옥한 후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함으로써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을 잠시 중단하였다. 
그 후 1907년 11월 시작된 대한협회가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자 이에 동참하여 언론활동을 지속하였다. 
남궁억은 독립협회 등 협회와 <독립신문>이나 <황성신문> 등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뿐 아니라 학회 활동을 통해서도 그 운동을 시행하였다. 그의 주관으로 1908년(융희 2년) 4월 강원도에 창립된 관동학회(關東學會)는 강원도 지역을 계몽하기 위한 애국 계몽운동 단체이다. 1908년부터 간행된 <교육월보>는 교육계몽 잡지로서 이 역시 남궁억이 주관한 것이며, 1909년에는 학회 회장이 되었다. 그는 관동학회를 통해 강원도 지역의 문맹률을 낮추었고, 서구의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보급하는 일에 헌신했다.
남궁억은 배화학당 교사 시절 집필에도 힘써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 등의 교과서를 편찬했고, 《우리의 역사》, 《언문체법》, 《가정교육》, 《무궁화 지도》, 그리고 《육아법》 등을 집필하여 발간하고 애국가사 보급과 한글 서체 창안 및 보급을 통해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남궁억 선생은 1918년 12월 보리울 주택에서 예배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모곡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였다.
남궁억 선생은 1918년 12월 보리울 주택에서 예배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모곡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였다.

낙향과 신앙생활
남궁억은 1915년 남감리회 전도사가 되었고, 나이 56세 되던 1918년 건강이 나빠지자 선친의 고향인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낙향하였다. 
선친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 해인 1919년 적당한 곳에 대지를 마련하여 예배당을 신축한 후 예배를 인도하면서 예배당 안에 4년간 초등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과 계몽활동을 지속하였다. 지금은 당시의 예배당 자리에 한서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모곡학교는 1923년 8월까지 모곡교회 안에 활발하게 유지되었고, 1923년 9월 감리회 선교부와 홍천군민들이 한마음으로 100여 평의 교사와 기숙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모곡학교는 1925년 3월 조선총독부로부터 6년제 정식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남궁억은 평소에는 학교에서 교사와 부락의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주일에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설교하였다. 그는 바쁜 일과 중에도 저술활동을 지속하여 1924년에는 《동사략》 전 4권, 1929년에는 《조선이야기》 전 5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애국의 정신을 담은 찬송가 가사와 시 및 창가(唱歌) 등을 전국 교회와 여러 기독교 학교에 보급하였다. 그가 1933년 지어서 가르친 “무궁화동산”은 일제의 감정을 자극했고, 결국 붙잡혀 8개월 동안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교육 및 비밀결사를 위한 십자가당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다시 투옥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가 지은 창가(唱歌)는 “무궁화동산”, “기러기 노래”, “조선의 노래”, “운동가”, “조선지리가”(朝鮮地理歌) 등이 있고, 찬송가로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 있다.
남궁억이 전국 단위로 펼쳤던 ‘무궁화 심기운동’은 일제의 표적이 되었고, 결국 조선총독부에 의해 묘목 8만 주가 불태워졌고, 무궁화 보급운동에 동참한 인물들이 구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립학교였던 모곡학교도 강제로 공립학교로 편입되었다.
그가 기독교인 전도사와 장로로서 복음 안에서 애국과 계몽운동을 추진한 점은 후대가 본받을 신앙 유산이다. 그는 1939년 4월 5일 향년 77세에 후세에 훌륭한 귀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그는 시인답게 노래 100여 곡을 지었는데 현전하는 것은 10곡이다. 그가 마태복음 9장 37절을 읽다가 작사했다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찬송가에 게재되어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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