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⑫ 박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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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⑫ 박에스더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22.04.0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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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박에스더(E.K. Pak, 1876-1910)의사, 과학기술인명예의전당 헌정
박에스더(E.K. Pak, 1876-1910)의사, 과학기술인명예의전당 헌정

이화학당의 네 번째 입학생이 되다

저는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포기할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이것을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배울 수 없다면 그때 포기하겠습니다. 이전에는 아닙니다.” - 박에스더(1897)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의 여성 미국 유학생이자 의사로서 근대의료와 사회봉사에 새 장을 연 인물로, 후일 많은 젊은 여성들의 역할모델이었다. 그녀는 ‘김점동’(金點童)으로 태어나 세례를 받고 세례명 ‘에스더’(Esther)로 지냈으며, 박유산과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Esther K. Pak)가 되었다. 그녀는 세 개의 이름으로 한말 격동기에 태어나 34년간의 짧으나 아름다운 생으로 한국 기독교사와 근대의료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한국 여성의료의 선구자, 최초의 여의사라는 칭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녀의 출생년도도 아직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그녀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연구는 많지 않다.

그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로제타 홀(Rosetta S. Hall)에 따르면 박에스더는 1876년 3월 16일 서울 정동에서 아버지 광산 김씨 홍택과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의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점동이었다. 1884년부터 내한한 미국 선교사들은 김홍택의 집 근처인 정동을 거점으로 교육과 의료 선교사업을 시작했고, 김점동의 부친 김홍택은 1885년 6월 이후에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의 첫 양반 고용인이 되어 생계를 이어갔다.

1886년 11월, 김점동은 10세의 나이로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 되었다. 아펜젤러와 같은 감리교 소속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그해 5월 정동에 여성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이화학당에 아버지 김홍택의 손에 이끌려 입학한 것이다. 초기 이화학당 학생 대부분은 교육보다는 가난을 면하려 하거나 선교사의 권고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김홍택도 셋째 딸 김점동이 이화학당에 들어가면 쌀과 의복을 얻고 선교사들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딸에게 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김점동은 이화학당에 입학하면서부터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벨뷰 옥실러리(The Bellevue Auxiliary)라는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인근의 작은 단체로부터 매년 40달러를 지원받았다.

로제타 셔우드의 통역을 하다

한국 최초의 여성전문병원, 보구여관.
한국 최초의 여성전문병원, 보구여관.

김점동은 학습속도가 빠르고 영어 실력이 출중하였다. 그녀는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1890년 10월 이화학당 관내의 여성만을 위한 진료소인 ‘보구여관’에서 로제타 셔우드(Dr. Rosetta Sherwood)를 만나 그녀의 통역과 진료보조로 일하게 된다. 로제타 셔우드와의 이 만남은 김점동이 서양의학을 처음 접하게 된 사건이며, 이를 계기로 그녀는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되는 여정의 든든한 후원자를 얻게 된 것이다. 로제타 셔우드의 1890년 10월 13일 일기에는 “김점동이 ‘아주 좋은 통역사’이지만 그녀는 약제실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김점동을 훈련시키는 것이 자신을 돕는 데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시야를 넓혀 “장래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마치 김점동의 미래를 예견한듯하다. 김점동이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893년 로제타 셔우드의 언청이 수술을 본 후였다. 통역사로, 의료보조로 로제타 셔우드를 도우며 그녀는 생리학을 배우는 등 의사로서의 꿈과 유학의 꿈을 키워 나갔다.

결혼과 유학

박에스더와 박여선 부부.
박에스더와 박여선 부부.

김점동이 영적 감화를 받은 것은 그녀가 이화학당에 입학한 지 2년째 되던 1888년 무렵이다. 폭풍우가 심했던 어느 날 밤 노아의 홍수처럼 인간을 심판하려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친구와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 기도 중에 입신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다른 학우들과 함께 매일 밤 기도회를 가졌다고 한다. 김점동은 신앙심이 깊어졌고, 마침내 1891년 1월 25일 올링거(F. Ohlinger)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에스더’(愛施德, Esther)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이때부터 선교사들은 물론 그녀가 정한 ‘에스더’라는 이름을 ‘김점동’ 대신 사용했다.

세례 받고 2년 후 김에스더는 1893년 5월 5일 26세의 박유산과 약혼하고, 5월 24일 기독교식으로 결혼하였다. 에스더의 아버지 김홍택이 사망하고 두 언니가 결혼하자 어머니는 16세가 된 에스더를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결혼시키기로 하고, 선교사에게 신랑감을 찾아 주기를 부탁했다. 에스더는 결혼 생각이 없었지만 결혼하지 않으면 기독교신자가 아닌 사람과 결혼시키겠다고 했다. 이에 1892년에 로제타 셔우드와 결혼한 윌리엄 홀이 박유산을 추천했다. 박유산은 윌리엄 홀이 1892년 가을 평양에 선교개척자로 임명되어 갈 때 마부로 고용되어 홀의 전도를 통해 성경을 배우고 입신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에스더’는 ‘박에스더’로 불렸다.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양인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이듬해 1894년 5월 4일 박에스더와 박유산은 윌리엄 홀과 로제타 홀 부부를 따라 평양 선교 개척에 동행했다. 평양에 도착한 지 한달 만에 청일전쟁 발발로 박에스더, 박유산, 로제타 홀과 윌리엄 홀은 모두 서울로 철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윌리엄 홀은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전쟁 부상자와 전염병 환자를 돌보았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윌리엄 홀은 발진티푸스에 걸려 1894년 11월 24일 사망하게 된다. 이때 로제타 홀은 임신 7개월에 한 살 된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뉴욕주 리버티 친정으로 귀국을 결정했다. 박에스더는 로제타 홀에게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로제타 홀은 에스더를 의학공부 시킬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해 여성해외선교회의 허락을 받고 재정적 후원을 받아 박에스더, 박유산과 함께 1894년 12월 16일 미국으로 출발했다.

1895년 1월에 뉴욕에 도착한 박에스더는 곧바로 2월 1일에 뉴욕 리버티(Liberty) 공립학교에 편입하여 고등학교 과정을 밟았다. 그해 9월 박에스더는 뉴욕의 유아병원(Nursery and Child’s Hospital)에서 1년 남짓 근무하면서 생활비를 마련한다. 동시에 월버그 부인(Mrs Walberg)에게 라틴어, 물리학, 수학을 개인교수 받으며 의과대학 입학을 위한 이론을 공부할 뿐만 아니라 공공의료시설과 병원에서 일 년 동안 6,000여 건의 실습을 병행했다. 이러한 가운데 박에스더는 1896년 2월 21일 첫딸을 출산하였다. 그해 10월 1일,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현재의 존스홉킨스대학(Johns Hopkins University)인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했다. 당시 신입생 300명 가운데 최연소였고, 서양의학을 전공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여성이 되었다. 한편 박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은 미국에 도착한 후 아내 에스더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뉴욕 리버티의 로제타 홀 가족의 농장에서, 에스더가 의과대학에서 수학할 때는 볼티모어 식당에서 일하며 그녀를 지원했다.

아이와 남편을 잃다

가난하고 고된 미국 유학생활이었지만 염원했던 의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기쁨도 잠시, 그녀는 큰 슬픔을 겪게 된다. 의과대학 1년 차, 1897년 3월 15일, 태어난 지 갓 1년이 지난 에스더의 첫딸이 폐렴으로 10일 동안 앓다가 엄마의 품을 떠난 것이다. 절망이 컸지만 에스더는 포기하지 않았다. 로제타 홀이 한국으로 함께 돌아가자는 제안도 거절하고 계속 공부하여 의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의학공부 3년차 과정이 끝나갈 무렵, 박에스더는 또 한 번의 큰 시련을 겪게 된다. 그녀의 남편, 최고의 후원자였던 박유산이 폐결핵으로 입원하여 1년 여간 투병하다가 1900년 4월 28일 사망하였다. 에스더가 의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900년 6월 졸업할 때 그녀에게는 딸도, 남편도 없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는 동안 딸도 남편도 그녀의 곁을 떠난 것이다.

짧고 굵은 생을 마감하다

졸업 후 박에스더는 미국에서 의사로서의 활동 제안을 거절하고 1900년 11월에 귀국하여 1897년 11월에 재입국한 로제타 홀과 여성치료소 ‘광혜여원’에서, 그리고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의 보구여관에서, 그리고 다시 평양의 ‘광혜여원’에서 1905년 7월 초 그녀가 폐결핵 초기 증상으로 치료를 중단할 때까지 로제타 홀과 함께 매년 적게는 2,414건, 많게는 8,638건을 치료했다. 병원에서의 치료뿐 아니라 왕진, 위생학 강의, 지방순회 선교활동 등 박에스더는 그야말로 귀국 후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의료선교에 매진했다. 1907년 휴양에서 돌아온 박에스더는 다시 진료와 전도사업을 시작했으나 다시 병이 악화되어 결국 1910년 4월 13일 34세로 둘째 언니 신마리아의 집에서 생을 마감, 4월 15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투병 중이던 사망 일 년 전 1909년 4월 28일, 관민합동으로 경희궁에서 개최된 ‘초대 여자외국유학생 환영회’에서 여성교육가 윤정원, 하란사와 함께 박에스더는 ‘부인사회 급(及) 여자학교 환영회 기념(紀念)’ 기념메달을 받았다. 국가로부터, 그리고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의 삶이 인정받고 칭송받은 것이다.

한말 격동기에 태어나 34년 만에 마친 짧은 생애였지만, 최초의 미국 유학 여성, 최초의 여의사로서 박에스더 그녀의 삶은 한국 근대 여성사, 의료사뿐만 아니라 로제타 홀과 관계된 선교사(宣敎史)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인물로 더 적극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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