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⑤ 서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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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⑤ 서경조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19.07.1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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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徐景祚, 1852-1938)목사(소래교회 설립), 독립운동가의 가문
(徐景祚, 1852-1938)목사(소래교회 설립), 독립운동가의 가문

기독교에 입문하다

서경조의 본명은 상우(相佑), 자(字)는 경조였는데 경조로 개명하였다. 그는 1852년 12월 14일 평북 의주에서 몰락한 양반 서석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독학으로 한문을 익혀 한서를 읽을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만주에서 처음 기독교인들을 접하면서 그는 기독교에 큰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수 믿는 중국인들의 겸손한 모습에 크게 감동하였다. 또한 중국인과 서양인이 함께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을 통하여 많은 서적을 읽고 기독교와 신문화(=서양문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에 기독교는 금지된 서양 종교였으므로 그는 매킨타이어(J.MacIntyre)의 전도에 쉽게 응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만주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 기독교인이 된 형 서상륜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의주에서 전도하였는데 이웃 사람들의 박해를 받았다. 그는 1883년 외가 6촌의 집이 있는 황해도 소래 지방으로 형을 따라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로스(John Ross)가 보낸 성경 《신약전서》와 《덕혜입문》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을 정독하던 중 로마서를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속죄의 의미를 깨우쳤다.

1883년 5월 최초 교인들이 모임을 가진 곳으로 알려진 장소.
1883년 5월 최초 교인들이 모임을 가진 곳으로 알려진 장소.

한국의 첫 교회, 소래교회를 설립하다

1887년에는 황해도 전역을 순방하던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장연 소래교회에 와서 서경조, 정공빈 등 100여 명의 신자에게 최초로 세례를 주었다.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는 유아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유아세례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서경조는 1888년부터 본격적으로 교회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서경조와 서상륜은 옹진군 백령면 연화리의 한학서당에 중화동교회(中和洞敎會)를 개설하여 설립 예배를 인도하였고, 1899년 소래교회에서 건축자재를 구하여 4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J.Ross), 매켄타이어(J.Macintyre) 공역 예수셩교젼셔.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로스(J.Ross), 매켄타이어(J.Macintyre) 공역 예수셩교젼셔.

 

순회전도자로 활약하다

서경조는 1888년부터 언더우드의 조사 및 권서로 황해도 장연에서 활동하였다. 1890년 캐나다 침례교 선교사 펜윅(Malcolm Fenwick), 1893년 윌리엄 매켄지(William J. McKenzie)가 내한하여 황해도 지역의 선교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1893년에는 미국 선교사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의 초청으로 약 1개월간 함께 대구, 용궁, 안동, 전의, 경주, 울산, 동래, 상주, 경주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지역 주민들에게 대구에서는 성경을 배포했고, 상주에서는 4-5일간 향교에서 전도하고 《덕혜입문》을 소개했고, 경주에서는 전도하다가 구경꾼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그 후 마펫(마포삼열), 레이놀즈(이눌서) 등과 함께 충청도의 공주와 청주 지방에서 전도하였다. 그는 공주에서 달력을 많이 팔았고, 청주로 가던 중 어느 시장 거리에서 성경을 많이 팔았다. 또 청주에서도 가지고 있던 성경을 전부 판매하였다. 순회전도자가 된 그는 부산과 인근 지방의 전도자로도 활동하였다.

서경조는 한국어가 서툰 선교사들과 함께 해서지방을 순회전도하였다. 1893년에는 장연군 칠곡교회와 문화군 사평동교회를 세웠으며, 1894년 곡산읍교회를 세웠다. 그는 소래지역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지역에서 순회하면서 성경, 찬송가와 기독교 서적을 팔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서경조는 1900년 소래교회 장로로 임직하였고, 그 이후 해서지방의 교회 개척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 최초의 7인의 목사 중 한 사람이 되다

서경조는 언더우드의 집에서 1890년 시작된 신학반 교육에 참석하였다. 조사와 매서로서 수업을 시작했던 그는 1904년 평양장로회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수업을 받았다. 1907년 6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그는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에서 목사임직을 받았다. 서경조는 길선주, 이기풍,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송인서와 함께 한국 장로교회의 첫 번째 7인 목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황해도의 전도목사로 파견되어 임지인 황해도 장연, 옹진 등에서 2년간 미국 선교사 샤프(C.E. Sharp)와 함께 전도목사로 활동하였다.

새문안교회와 경기지방 순회 사역하다

1904년 9월 13일 한국 장로교회 제4회 공의회가 동현교회에서 열렸을 때, 서경조는 발언권을 얻어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교회가 설립되고 많은 동포들이 교회를 통하여 구원받게 된 것을 감사하여 감사절을 지키자고 동의했고, 이것이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1904년 이후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고 있다. 1910년에 그는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에 초빙되어 협동목사로 시무하였다. 이후 경기도 고양군, 시흥군, 파주군, 양주군 등 경기도 일원에서 순회목사로 전도활동과 강연활동을 다녔다. 서경조는 경기도 서쪽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의 개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민족 독립운동의 후원자로

서경조는 1913년 새문안교회 협동목사를 사임하고 목사직에서 은퇴한 뒤 고향 장연군의 소래로 내려갔다. 1926년 이후 그는 중국 상해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면서 남은 삶을 보냈다. 그는 아들 서병호를 따라 중국으로 갔는데, 서병호의 아내 김구례의 집안은 상당수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서경조는 1938년 7월 27일 중국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서병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당수로 취임하였다. 3·1운동 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제헌 의정원 내무위원으로 일했다. 1945년 8·15광복 이후 서병호는 1947년 8월 귀국하여 새문안교회 장로로 임직했으며, 교육계에서 일하였다. 고인(故人) 서병호에게 1980년과 1990년에 각각 대한민국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글 임희국, 공동집필(이선이: 아태장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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