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③ 한석진
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저는 주님께서 제게 한 씨[한석진]와 같은 좋은 조사를 주신 것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는 보배로운 사람이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 Samuel A. Moffett(1894)
“잘못된 겸양관(謙讓觀)을 배격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로 난 신자로서 가져야 할 솔직, 진실, 용기, 자존심, 독립심, 인내력과 주체성의 새 생활표준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 백낙준(1971)
“그[한석진]의 마음은 진리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신 분이요, 새로운 문화에 대하여 남보다 먼저 눈을 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통찰력과 선견지명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 한경직(1971)
청년기, 구도자적 방황을 하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을 기념한 졸업생 7명의 사진에서 한 명이 눈에 띈다. 앞줄 맨 왼쪽에 자리 잡은 이. 함께 기념 촬영한 다른 6명과는 달리 그는 갓과 감투를 쓰지 않고, 머리를 단발로 깎고 안경을 쓰고 단장을 가진 모습이다. 한석진이다. 장로교 최초 7인 목사 중 한 명. 그는 ‘믿음이란 참된 생명 하나 얻자는 것이므로 제도니 의식이니 계율에 매여서 그 생명이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앙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는 전통을 업신여기거나 우상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근거한 해방과 개방성, 신문화에 대한 개방성을 강조한 것이다. 개혁적 지도력을 가졌으며 진리로 자유케 된 장로교 최초의 목회자의 모습이다. 이런 한석진의 모습은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나라를 독립시키려는 꿈은 물론 선교사의 한국선교 정책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한국인에 의한 주체적 교회 설립의 꿈을 실현시키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한석진은 1868년 9월 6일 평북 의주읍 동부동에서 한사운의 3남으로 출생했다. 선비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열 살이 넘어 중국 고대사를 읽던 중 조선인이 중국사를 배우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질 정도로 남다른 ‘주체의식’을 갖고 자랐다고 한다. 채필근 목사가 편찬한 《한국기독교개척자 한석진 목사와 그 시대》(대한기독교서회, 1971)에 따르면, 그는 자라면서 양반들의 철없는 행동과 삶과 연결되지 못하는 유교의 가르침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열여섯 되던 해에 구도의 길을 떠나 석숭산 불교 암자에서 불경을 공부하기도 하고, 백두산 도인을 찾아 가출도 했다고 한다. 그가 추구했던 도(道)는 삶으로 사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곳에서도 그런 도를 찾지 못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 18세 때 한석진은 가족의 강요로 결혼해서 슬하에 아들을 얻었으나 여전히 그는 도를 찾아 나섰다.
마펫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다
1887년부터 그는 장사하기 위해 중국 산동성 만주를 내왕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의주에는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온 백홍준, 이응찬, 서상륜 등 의주 청년 중심의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 관계하며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된 한석진은 마침내 1891년 3월 선교사 마펫(S.A. Moffett, 마포삼열)과 게일(J.S. Gale, 기일)을 압록강변 통군정에서 만났고, 그해 9월 의주를 방문한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한석진은 이듬해 1892년 11월 서울 정동의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신학반’에 들어가 복음의 진수를 배웠다. 이는 한석진이 참된 구도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신학반 과정이 끝난 뒤에도 한석진은 서울에 남아 마펫 선교사에게 개인적으로 신학을 배웠다.
이후 한석진은 선교사들이 선교지 한국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1893년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선교부를 개척할 때 가족을 평양으로 이주시켜 평양선교부 설치를 도운 일이 그 일례이다. 평양 사람들이 외지인에게 집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삶의 터전인 고향 의주에서 가족들을 평양으로 이주시켜 자신의 명의로 평양 대동문 안 널다리골에 집을 한 채 사서 평양의 첫 교회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해 1893년 10월 한석진은 마펫 선교사의 조사(助事)로 임명된다. 특이한 것은 한석진은 다른 조사와는 달리 선교사로부터 조사의 봉급을 받지 않고 전도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조달했다는 점이다. 한석진 연구를 한 이덕주 교수는 이를 ‘자주’(自主)와 ‘자강’(自强)의 표현으로 “‘삯꾼 목자’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와 돈으로 인한 선교사의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고 있다[《한국 기독교 선구자 한석진 목사의 생애와 사상: 나라의 독립 교회의 독립》(기독교문사, 1988)]. 한석진의 이와 같은 자주, 자강의 주체의식은 선교사-조사 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선교사들의 안식년을 한인 목회자들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실현에서 볼 수 있다. 1896년 마펫 선교사가 안식년을 얻어 본국으로 들어가자 그의 조사로 섬기던 한석진 역시 평양을 떠나 소우물(현 장천)로 들어가 안식하며 그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한석진이 강조한 자주, 자강의 주체적 교회 설립 원칙은 장대현교회, 서울 안동교회, 마산 문창교회, 신의주제일교회 건축과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건축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장로교 최초의 목사가 되다
한석진은 1903년 6월 24일 자신의 안식년 때 개척한 소우물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하고 그해 9월부터 장로회공의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904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신학을 수학한 후 1907년 6월 20일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같은 해 917일 대한예수교장로회독노회가 창립될 때 한석진은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길선주와 함께 장로교 최초 목사가 되었다. 또한 한석진은 독노회의 서기로 피선되어 노회를 섬겼으며, 5년 후 1912년 9월 1일 장로교 총회가 창립될 때 총회 서기로 피선되었다. 이듬해 제2회 총회 때 한석진은 부총회장으로, 그리고 1917년 9월 11일 제6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피선되어 한국교회를 이끌었다. 한석진은 자주, 자강의 주체적 지도력을 노회나 총회의 임원이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실현했다. 정성한 교수는 〈한석진 목사의 목회리더십〉[《장로교 최초 목사 7인 리더십》 (쿰란, 2010)]이라는 연구에서 “한석진 목사는, 한국교회를 통해 한국 국민들이 자치 능력을 길러 국제사회에 우뚝 섬으로써 세계 종교문화의 큰 조류에 같이 참여하게 되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주체적 지도력은 특히 1925년 12월 28-29일에 서울 조선호텔에서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 Conference, IMC) 회장 모트(J.R. Mott)가 내한하여 열린 ‘한국교회 지도자 초청 간담회’에서 두드러졌다. 한국 대표와 선교사 대표 각각 31명이 모인 이 모임에서 한석진은 한국교회의 자주성과 기독교의 토착화를 날카롭게 주장하였다.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다
한편 한석진의 자주, 자강의 지도력은 교회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가 마펫 선교사의 조사로 복음 전도에 전념할 때 그는 동시에 1896년 부터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에 의해 설립된 독립협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한석진은 협회의 관서 지부장으로 평양지회 조직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 민족운동 세력을 규합하여 독립협회 조직을 성장시켰다. 1898년 9월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회 회관 설립을 추진하였고, 평양 대동강 서편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열린 만민공동회를 주최하여 도산 안창호의 유명한 ‘쾌재정 연설’도 주선하였다. 또한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한석진의 설교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또한 1919년 3·1운동 당시 한석진은 마산교회를 담임하였는데, 3월 3일부터 시작된 마산의 만세운동 주동자들 대부분이 마산교회 교인들이었다. 이 만세운동에 한석진이 적극 가담한 흔적은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그의 자주, 자강의 설교는 교인들로 하여금 일제의 억압에 고통당하는 민족의 아픔과 함께하게했으며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석진은 1909년 장로교 독노회에 의해 일본 유학생을 위한 일본 선교사로 파송 받아 1909년 10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 활동하면서 동경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동경한인교회’라는 자생적 신앙공동체를 설립하고 돌아왔다. 1883년 이수정이 동경에서 세례를 받고 형성한 유학생 중심의 신앙공동체가 1909년 한석진에 의해 부활하였고, 동경YMCA와 더불어 이들은 1919년 2·8독립선언의 주역이 되었다.
한석진의 역사적 위치를 살펴보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나바가 연상된다. 바나바는 12사도 중심의 예루살렘과 바울 중심의 안디옥을 연결한 중재자이다. 바나바의 매개로 안디옥과 예루살렘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갔고, 신생 안디옥교회는 새로운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한석진은 선교사 공동체와 자생적 한인 신앙공동체를 적극 매개하여 선교사가 선교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헌신한 중재자였으며, 한인신앙공동체의 자주, 자강의 주체성을 확립하여 선교하는 교회로 서도록 그 기초를 마련하였다. 한국교회 지도력의 위기가 논의되는 시점에서 그를 한국의 바나바로 평가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