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⑭ 이 준
상태바
[특집]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 - ⑭ 이 준
  • 해피코리아e뉴스
  • 승인 2022.04.24 11: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독교는 대한민국 역사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다해왔다. 해피코리아e뉴스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다한 인물 120인을 소개한다. 소개되는 기독교인 120인은 (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으로 발간한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을 단체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게재한다.

이준(李儁, 1859-1907)순국자, 독립운동가(독립운동∼헤이그 밀사사건)
이준(李儁, 1859-1907)
순국자, 독립운동가
(독립운동∼헤이그 밀사사건)

애국계몽운동의 선봉에 서다

이준은 1859년 1월 21일 함경북도 북청에서 부친 이병관(李秉瓘)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세 살 때 유학자인 부친이 사망하고 곧이어 모친마저 별세하자 조부 이명섭(李命燮)과 숙부 이병하(李秉夏) 슬하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16세인 1875년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당대의 대학자인 최익현(崔益鉉)으로부터 재사(才士)를 인정받았다. 1884년 함경도시(咸境道試)에 장원급제하고, 북청에서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매진했다.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純陵參奉)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1895년 처음 설립된 법관양성소에 수학하여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법관생활을 시작했으나 탐관오리들의 모함으로 인해 2개월 만에 사직했다. 이때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 협성회(協成會)를 결성하고 구국운동에 동참했다. 이듬해 독립협회 평의원에 선출되어 〈독립신문〉 간행, 독립문 건설, 가두연설 등으로 맹활약하다가, 개화파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전신인 동경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이로써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서구 근대 법학의 수용자가 되었다.

1898년 귀국한 이준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며 가두연설을 하다가 이승만(李承晩),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당하였다.

1902년 민영환(閔泳渙), 이상재(李商在),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양기탁(梁起鐸), 남궁억(南宮檍)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결성했다.

1904년 러일전쟁 후에는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황무지 개간권을 빼앗으려는 일본의 음모를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또 친일 조직인 일진회(一進會)를 배척하기 위해 공진회(共進會)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1905년 5월에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입헌정치체제를 연구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하였고, 1906년에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는 한편 가산을 정리하여 돈화문 근처에 야학인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했다. 또한 고향인 함경도에는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여 애국계몽과 교육구국운동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수차에 걸쳐 투옥당하거나 유배되었는데, 그때마다 성경을 읽는 기회로 삼았다.

기독교민족주의자로 거듭나다

 

만국평화회의 개최지
만국평화회의 개최지

이준이 처음 기독교의 복음을 접하게 된 것은 1899년 1월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되면서이다. 당시 한성감옥에는 이준 외에 이승만, 이동녕, 이상재, 이원긍(李源兢), 유성준(兪星濬), 홍재기(洪在箕), 안국선(安國善), 김정식(金貞植), 신흥우(申興雨), 양의종(梁義宗), 박용만(朴容萬), 정순만(鄭淳萬), 이승인(李承仁), 유동근(柳東根), 이종일(李鍾一) 등 고위급 정치인들이 상당수 감금되어 있었다. 이들은 배재학당 출신인 이승만, 신흥우 등을 제외하면 기독교와는 관련이 없었는데 아펜젤러, 벙커, 언더우드, 게일, 헐버트 등 선교사들이 석방운동을 펴는 한편 기독교 서적과 교양서적을 넣어 주었다. 이들은 한성감옥 도서실에 비치된 기독교 도서들을 읽는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접하였고 집단 개종사건이 일어났다. 이준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옥중 동지인 이원긍이 출옥 후 게일 선교사가 시무하던 연동교회로 출석하자 그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출석하였고 집사의 직분도 받았다.

이준은 처음에는 교회를 정치생활의 피난처 정도로 생각하던 형식적인 크리스천이었으나, 유배생활을 통해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주는 구속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가 기독교민족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갖게 된 계기는 1905년 초 상동교회로 교적을 옮기면서부터이다. 그는 전덕기(全德基) 목사의 신앙지도를 통해 깊은 신앙세계를 체험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주일성수를 감당하면서 예배에 참석하였고, 평시에도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해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감리교 엡윗청년회 전국연합회는 상동교회에 모여 대책을 논의한 결과, ‘을사늑약 무효상소운동’을 결의하였다. 이때 이준은 상동교회 대표로 참석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린 후에 도끼를 어깨에 메고 대한문 앞으로 나가 상소를 올리는 시위를 전개했다. 1906년 4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설립되었는데, 1년 전 이준과 양한묵(梁漢默) 등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개편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도 참여하여 활발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

당시 상동교회에서는 청년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애국지사의 총집합소나 마찬가지였다. 청년학원은 전덕기 목사가 신교육운동을 위해 세운 학교로 이상재, 이승만, 이동녕, 김구(金九), 남궁억(南宮檍), 노백린(盧伯麟), 신채호(申采浩), 윤치호(尹致昊), 최광옥(崔光玉)등이 매주 모여 시국을 토론하고 독립운동을 상의했다. 교사 자격자를 대상으로 국어강습소를 개설하고 매주 일요일마다 주시경(周時經)이 한글을 가르쳤다. 이때 이준은 엡윗청년회 회장으로 상동교회가 운영하는 모든 민족운동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면서 기독교민족주의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헤이그에서 순국하다

일본은 1905년 11월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해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고종은 조약을 인준하지 않고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다. 미국의 헐버트(H.B.Hulbert)에게 전보를 보내 반대운동을 벌이게 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06년 6월 평화회의 주창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Nicholas Ⅱ)가 고종 앞으로 제2회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보내왔다. 고종은 일제의 폭력적 침략을 호소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회의에 특사를 파견키로 하고, 정사(正使)에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 부사(副使)에 전 평리원검사 이준과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 이위종(李瑋鍾) 등 3인을 선정했다. 당시 이상설은 간도에 있었기 때문에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떠난 이준은 부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합류하였고, 5월 21일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하여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헤이그 특사 신임장
헤이그 특사 신임장

이곳에서 이들은 이범진과 이위종을 만나 그간의 경과를 토론하며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후, 6월 19일 독일 베를린에서 친서를 인쇄하고 6월 25일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했다. 6월 28일 고종의 친서와 부속문서인 ‘일인 불법 행위’를 40여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내고, 다음 날 러시아 대표이며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A. Nelidov)를 방문했으나 면담을 거절당했다. 30일에는 부의장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를 방문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M. Van Tets)에게 급히 서한을 보내 면회를 요청했으나 평화회의에서의 발언은 어렵다는 통지를 받았다. 결국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체결된 것임을 폭로하려던 계획은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7월 9일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 스테드(W.T. Stead)가 주관한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하여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노어·불어·영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세계 언론인들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연설 전문은 “한국을 위해 호소한다”라는 제목으로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에 이준은 울분을 삭이지 못한 채 그곳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1907년 7월 14일의 일이다. 이때 국내에서는 이준이 평화회의 석상에서 할복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이준의 유해는 순국 3일 후에 헤이그 공동묘지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그의 동생인 이운이 도착한 뒤 9월 6일 장례식을 치렀다. 그해 8월 9일 일제통감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이상설은 교수형, 이위종과 이준은 종신형을 선고했다. 1962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유해는 순국한 지 55년 만인 1963년 10월 4일 돌아와 국민장을 치른 후에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1964년 장충단공원에 이준의 동상이 건립되었고, 1972년에는 헤이그 묘소에 그의 흉상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이준의 묘적이 건립된 구 묘역
이준의 묘적이 건립된 구 묘역

 

 


주요기사
이슈포토